소장과 경리 사이
* 관리소장과 경리 사이는 어떤 사이가 돼야 가장 좋을까?
관리사무실에서 가장 많이 봐야 하는 얼굴, 가장 많이 들어야 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경리직원이다. 관리사무실에서 관리직원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게 화기애애(和氣靄靄)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경리직원이고, 일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준비해주는 것도 경리직원이고, 관리소장의 교육일정 등 사소한 일까지 챙겨주는 것도 경리직원이다.
업무시간 뿐만 아니라 하루 통틀어서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사이가 관리소장과 경리직원 사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집에 있는 아내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 같다. 집에 있는 아내야 저녁시간 이후에나 같이 보내고 ‘잠들면 타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눈감고 잘 때야 엄격하게 구분하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니다. 하기야 꿈도 같은 꿈을 꾸는 부부가 있다면 그런 부부는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그렇게 눈 떠서 같이 있는 시간이 아내보다도 더 많기 때문에 ‘오피스 와이프(Office Wife)’라는 말이 생겼나보다. 이 말은 기업 회장이나 사장 또는 공공기관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스케줄을 관리해주는 여자 비서에게 쓰는 말이다. 전문지식을 갖추고 옷치장부터 매너와 연관되는 행동과 태도까지도 관리해주고 간섭하기 때문에 집에 있는 와이프(Wife)보다도 더 치밀하고 섬세한 데까지 신경을 써준다.
관리소장과 경리직원 사이도 그런 오피스 와이프 사이일까? 아니면 관리사무실에 게시된 관리조직 현황표처럼 단순히 조직에서 업무 지시받고 그 지시대로만 해야 되는, 그런 조직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사이일까. 아니면 또 어떤 사이가 있을까? 그리고 관리소장은 경리직원을 어떻게 대해야 가장 좋은 관계의 사이가 될까?
대구에 있는 한 아파트단지에서는 경리직원이 출금전표에 숫자를 추가하거나 잔액확인증명서를 위조하는 방법으로 많은 액수의 관리비를 횡령했다.
지출결의서와 예금인출서에는 인출할 만큼의 액수를 기재해 관리소장과 대표회장에게 결재를 받은 다음 예금인출서에 숫자를 추가 수정하는 방법으로 더 많은 액수를 인출 횡령하고, 나중에 잔액확인서도 오려내고 붙이는 방법으로 정교하게 복사해서 관리사무소에 비치했다.
아마도 이 아파트에서는 회계절차 시스템이 재래식이었는지, 아니면 경리직원 개인만 알 수 있는 엉터리 수기식이었는지 경위를 파악하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대표회장은 프로가 아니니 그렇다 치고, 회계원리까지 공부한 관리소장은 어떻게 관리했기에 그런 지경까지 됐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경리직원이 관리공금에 손을 댈 때는 여러 가지 징조가 나타난다. 돈 씀씀이 헤프고 사치가 눈에 띄게 심하다든지,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하게 업무를 본다든지, 평소에는 오픈 관리하던 회계 자료와 결재 자료를 이상하게 숨기고, 결재 받는데 예전 같지 않게 예민해진다든지 하는 것 등이 그런 징조다. 쥐가 막다른 곳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벼들듯이 사람이 돈이 몰리면 무슨 짓이든 다할 수 있고, 돈에 쫓기는 징조들이 외부로 나타난다.
이런 이상 징후를 느꼈을 때 관리소장은 그 동안의 관리 분위기보다는 좀 더 타이트하게 관리하면서 주도면밀하게 경리직원을 관찰해야 한다. 전표 결재하는 주기를 예전보다 좀 더 좁혀서 관리자금 입출금 현황을 자주 파악하고, 증빙자료 등도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매월 합계잔액시산표와 총계정원장을 비교 확인하고 잔액증명서와 통장 비교 확인을 꼼꼼하게 해야 한다. 경리직원의 횡령의 관리감독을 대표회장까지 포함해서 책임을 묻는 법원 판례가 나오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관리소장에게 책임이 있다.
① 이런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관리소장과 경리직원 사이는 사무적으로 일일이 꼼꼼하게 확인해야 하고,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살벌한 사이다.
그리고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례를 더 들어보자. 서울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난 최근의 사례다.
경리직원이 같이 근무하는 관리직원에게 1백만원을 빌려줬다. 돈이라는 것이 빌릴 때는 급한 마음에 이런 저런 딱한 사정을 다 동원해서 저자세로 부탁하지만, 돈을 갚을 때가 되면 안면몰수하고 못 갚겠다는 배짱으로 배부터 내미는 사람이 있다. 여기 돈을 빌려간 관리직원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경리직원이 꿔준 돈을 받으려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이 없자 급기야는 매월 지급하는 그 관리직원의 급여에서 1백만원을 무단으로 공제하고 지급했다. 이 문제가 불씨가 돼서 소란이 일어나자 대표회의가 해당 경리직원을 해고시켰다. 그 경리직원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돈을 받으려고 어쩔 수 없이 그런 방법으로 했는데 해고라니! 그 즉시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경리직원은 그 관리직원에게 돈을 빌려줬다는 이유를 항변하나 이는 당사자간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아파트의 공금을 담당하는 경리직원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관리직원의 임금을 다 지급하지 않고 일부를 편취한 것은 엄중하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표회의가 징계해고한 것은 정당하다.”
공금과 개인 돈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해고한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 노동위원회의 판단이다.
개인적으로 경리직원 입장에서 봤을 때는 억울한 일에 설상가상(雪上加霜), 더 억울한 일을 연거푸 당한 참혹한 경우다. 그것도 근로자에게는 너무 가혹한 해고라니! 이거는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거기에 대해서도 노동위원회 판단은 냉정하다.
“징계양정상 해고는 과다하다는 경리직원의 주장도 인정할 수 없다.”
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이런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법적인 절차를 밟아 월 급여에 정상적인 압류가 들어가는 경우에도 급여의 50%, 그것도 최저임금수준의 액수는 건드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방법과 길이 있는데도 경리직원처럼 일방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은 ‘부당한 편취’라고 해석한다. 공금을 다루는 담당업무의 중대성에 비춰볼 때는 구제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이 아파트에도 제대로 된 관리소장은 없었던 것 같다.
혹시나 우리 관리소장들이 근무하는 아파트에도 이런 형태의 경리직원이 있다면 적은 금액의 돈일지라도 공금과 개인 돈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가르치고 관리해야 한다. 남자는 술버릇 보면 평소에 감춰진 성격이 나오지만, 여자는 돈 버릇을 보면 감춰진 생활습관이 나온다. 공금과 개인 돈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리직원은 다른 업무에서도 공사(公私)를 뚜렷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관리소장들이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② 이런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관리소장과 경리직원 사이는 기본적인 것과 작은 것도 신경을 쓰면서 계속 가르쳐야 하는 피곤한 사이다.
요번에는 좋은 얘기해보자. 좋은 아파트로 간 경리직원이 이전에 같이 근무했던 관리소장을 데리고 간 얘기다.
K소장은 위탁관리 아파트에 근무하는 관리소장이다. 위탁관리에 소속된 관리소장이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주기적으로 위탁관리계약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골치 아픈 것은 대표회장의 비위를 잘못 건드리면 대표회장이 본사에 전화를 걸어 “관리소장 교체해 달라.”고 요구해서 난감한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요구를 받은 위탁관리 본사에서는 요구하는 이유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일방적으로 대표회장 쪽으로 치우쳐서, 대표회장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다반사다. 위탁관리 본사 입장에서도 그렇게 결정하는 것이 이익이다. 괜히 대표회장의 비위를 건드리면 아파트단지를 뺐기는 상황까지 확대될 수 있다. 대표회장 쪽에 서서 그가 요구하는대로 결정해주는 것이 매월 위탁수수료 챙기는데 이상이 없고, 관리소장이야 본사에는 항상 대기하고 있는 관리소장 후보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배치시키면서 생색을 내고 반대급부를 챙기면 이중으로 이득을 보는 것이다. 교체당하는 관리소장은 역할을 못한 책임을 물어서 적당히 대기시키면 그만이다.
K소장이 근무하는 아파트단지도 그런 대표회장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먼저 근무했던 관리소장도, 그 전에 근무했던 관리소장도 짧은 기간 근무하면서 그런 상황에 몰려 밀려났다. 그런 사정을 아는 K관리소장은 대표회장 눈에 나지 않으려고 조심을 하는 한편, 자치관리 아파트단지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그리 멀지 않은 자치관리 아파트단지에서 관리소장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제출하러 갔다. 그런데 바로 그 아파트단지에 근무하는 경리가 전에 같이 근무했던 적이 있는 경리직원이었다. 아주 반가웠다.
그리고 보름 뒤에 그 아파트로 자리를 옮겨 소망했던 자치관리 아파트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그 경리와 함께 근무하게 됐다.
근무한지 4개월쯤 지났을 때 대표회장으로부터 그때 경쟁자들이 많았었는데 K소장이 오게 된 경위를 자세히 듣게 됐다. 경리직원이 K소장과 같이 근무하고 싶어서 동대표들을 상대로 애를 많이 써서, 감사가 강력하게 추천했던 경쟁자를 물리치고 K소장이 발탁된 것이다.
그렇게 애를 썼으면서도 자기가 도와준 티를 내지 않은 그 경리직원이 예쁘지 않은가!
지금도 K소장은 “우리 경리, 백점짜리 경리.”라며 자랑하고 다닌다.
지난 번 관리소장과 경리가 같이 참석하는 점심 모임에서 내가 그 경리한테 말했다. “기회가 되면 나도 좀 당겨 달라. 그러면 나는 ‘백이십점짜리 경리’라고 소리치며 다니겠다.”고 말했더니,
우리 경리가 옆에서 하는 말이 “소장님은 내가 당겨줄 테니 걱정마라.”
……? 질투 섞인 목소리다.
③ 그런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관리소장과 경리직원 사이는 서로 도움을 주며 좋은 곳으로 당겨주는 사이다.
그런가 하면 관리소장 상대로 뻐쩡대며 틱틱거리는 경리도 있다.
S소장이 그런 경우인데 아파트단지 부임했을 때 그 경리직원은 그 아파트에서만 6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관리직원들의 역학관계를 살펴보면 아파트단지마다 참으로 특이한 게 많다. 관리직원들 중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리직원이 전기과장인 경우, 경리직원인 경우, 심지어는 경비실에서 근무하는 관리원인 경우도 있다.
지난 번 게시된 글에서 관리소장이 아파트단지에 새로 부임하면 대표회장과 동대표들의 성향을 가장 먼저 파악해야 된다고 말했는데, 사실은 그 전에 관리직원 중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리직원을 찾는 게 먼저다. 그렇게 찾은 중심인물을 통해서 아파트단지의 이런저런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신속하고 정확한 방법이다.
S소장 같은 경우에는 그 중심인물이 바로 경리직원이었다. 그런데 그 경리직원이 꺽지게 나오니 참으로 걱정이었다. 초기부터 넘어야 할 큰 언덕이 생긴 것이다. 다른 관리직원이면 또 몰라도 경리직원이라는 언덕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언덕이다. 이런 경우 그런 경리를 어떻게 다스려야 가장 지혜로운 것일까? 참 고민이다!
한참 전에 카페에 올렸던 글에 대한 댓글로 그와 같은 고민이 달라붙은 적이 있다.
“아파트단지에 배치된 지 백일이 되어갑니다. 오늘은 무지 화가 납니다. 소장 자리에 앉은 지 백일이 가까운데 아직도 이 아파트 소장은 경리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아파트에서 경리로 10년 넘게 근무한 사람과 백일도 못된 사람이 같지는 않겠지만 그런다고 소장 대접해달라고 대 놓고 말 하면 속알머리 없다고 할 것이고, 참 속상한 일이 많은데 어디 털어 놓을 데도 없네요. 직원 다루는 방법 좀 알려주세요. 저보다 나이 많고 근무 경력 넘쳐나는 직원 다루는 법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글을 달아줬다.
“경력자도 새로 부임하면 3~4개월 정도 자기주도성 없이 관찰하는 시기를 갖습니다. 초임이라면 6~7개월 정도는 관찰하는 기간이 필요. 기본적인 업무와 지시만 하고, 직원들을 다루려고 하지 말고 각자 성향만 파악. 그 기간 동안에 주택법과 그 아파트의 관리규약, 지난 동대표회의록(3년 전부터) 반복해서 읽으면서 내실강화. 새로운 민원과 소동이 생길 때 조금씩 주도권 장악하면서 직원 콘트롤. 10년 경력 경리라도 시기가 문제지 결국엔 관리소장에 구속받게 될 것입니다. 조바심 내지 말고 느긋하게 대처하세요. 지나고 나면 그런 고민할 때가 행복했던 추억이 많은 때입니다.”
고맙다는 추가 답글이 달렸는데, 그때 댓글을 단 관리소장은 그 언덕을 잘 넘었는지 참 궁금하다. 댓글 문맥으로 봤을 때는 상당히 혈기왕성하고 책임의식도 강한 젊은 관리소장 같았는데.
S소장이 나한테 물어온 적은 없다. 한 사람 건너 그렇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한테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의 답변은 그때 답글의 내용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시냇물이 ‘졸졸’대면서 흐르고, 강물이 ‘콸콸’대면서 거세게 쏟아 내려가도 결국엔 ‘바다’라는 품속으로 들어간다. 경리가 아무리 잘났다고 뻐팅겨도 결국엔 관리소장에게 기대게 되고 또 그렇게 기댈 때 가장 편안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쉬운 예로 아이에게 갑자기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 허락을 받고 외출을 할 것인가? 허락을 받을 때는 누구든지 저자세가 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경리가 아무리 뻐쩡대고 틱틱거려도 시기가 문제지, 결국엔 지시받고 지시에 따르는 위치에 서게 된다. 당연지사(當然之事)이고, 또 그렇게 돼야 관리 질서가 잡힌다.
그러면 그런 경우에 답글의 처방처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질서가 잡히는데 그 시간을 앞당길 수 없을까?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관리소장 각자가 개별 아파트단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맞추고, 자기 회계지식 수준에 맞춰서 찾아야 한다.
까탈부리는 경리에게는 까다로운 일을 시킨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려워서 쩔쩔맬 수 있는 그런 일. 물론 시키는 일 자체가 이유가 있고 대의명분 있는 일이어야 한다. 그런 일을 시키고 그 결과를 심각하게 검토해서 까다롭게 지적하고, 완벽하고 마음에 들 때까지 거듭해서 요구한다. 경리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주변의 대표회장이나 동대표들이 간섭하면 관리상 꼭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는 거라고 답변할 수 있는 명분과 이유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런 명분과 이유가 있는 일을 끙끙대면서 서너 번 하다보면 경리직원도 주눅 들어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안 쓰는 게 좋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리가 잡히고 질서가 잡힌다. 그 시기를 조급하게 앞당기려 서두르면 서로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 마음에 아픈 상처를 남기게 되면 그 후유증으로 인해 빨리 회복된다고 해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아 두고두고 찜찜함을 남긴다. 그러니 이런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는 생략하자.
그리고 까탈부리는 경리직원에 대해서는 조직의 장(長)인 우리 관리소장들이 아량으로 포용해주자. 엄마 없는 가정에 큰 딸이 아버지에게 투정부린다고 생각하고 잘못이 있어도 잘 감싸주자. 그런 방법이 가장 포근하고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조직의 질서가 잡히는 시기도 빨리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이다.
④ 어쨌든 S소장처럼 그런 아파트에 근무하는 관리소장과 경리 사이는 껄끄럽고 어색한 사이다.
관리소장의 일이 보통 열(10)이라면 어떤 경리직원와 같이 일하는 가에 따라 그 일이 셋(3)으로 줄 수 있고, 열 일곱(17)로 늘어날 수도 있다. 경리가 말이 많고 자기가 한 말도 주워 담지도 못하는 그런 경리직원는 관리사무실을 시장터로 만든다. 그러니 관리소장이라도 나서서 주워 담을 수밖에 없다. 엉뚱하게 관리소장이 직접 나서야 하는 일이 많아진다.
구청마다 다르겠지만 겨울철에는 음식물찌꺼기가 얼어서 수거하는데 불편하기 때문에 세대에서 배출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그때만 처리하게 한다. 그리고 구청에서도 시간을 정해놓고 수거해가는 차량을 운행한다.
그 문제로 세대에서 전화가 오면 “네, 불편하시죠. 겨울철 음식물이 어는 문제가 있어서 시청에서도 협조공문이 왔기에…….” 그렇게 시작해서 깔끔하게 답변하면 싸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문의한 세대가 열 받아서 관리사무실에 오게 하고…….
한 번의 전화로 끝낼 일을 3~4번씩 전화해도 처리하지 못하는 경리. 그것도 시끄러운 목소리로. 수다쟁이 기질은 완전 ‘꽝’이다.
나는 경리직원을 뽑을 때 이력서를 보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하는데 필요 이상의 답변을 줄줄이 해대는 사람은 제외시킨다. 아파트 경리로선 빵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추린 대상자 중에서 전화를 해봐서 전화목소리가 차분한 사람을 뽑는다. 다른 건 가르치면 되지만 과잉답변하는 습관과 차분한 목소리는 가르쳐도 안 된다.
그래서 지난 번 게시한 글 ‘가장 행복한 관리소장’ 경리에 대한 부분에서 이렇게 서술한 적이 있다.
‘차분하고 절제 있는 목소리의 경리직원 :
외모는 수수하고 펑퍼짐한 아줌마라도 목소리는 차분해서, 전화 받는 목소리가 곁에서 일해도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는 목소리. 원래 갖고 있는 볼륨이 중간 음으로 분위기를 조용하게 만들고, 말을 아껴가면서 차분하게 민원인을 대응할 수 있는 경리직원과 함께 일하는 관리소장.’
그 글을 쓸 때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지금은 집안에 사정이 있어서 그만 둔 그 경리직원이다.
내가 그 아파트에 부임했을 때 시골처녀처럼 수줍게 맞아줬다.
그리고 보름쯤 지났을 때 대표회장의 성향과 동대표 중심 인물들의 성격과 부녀회장의 성격 등 틈날 때마다 조금씩 부담 갖지 않게, 노골적이 아닌 적당히 힌트만 주는 식으로 깨닫게 해줬다.
동대표회의 때 자주 거론되는 회계장부의 특정 계정과목에 대한 예상 질문을 답변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해주고,
목소리가 차분해서 전화로 오는 민원전화의 95%는 혼자 처리하고, 관련 법률과 관리규약 등을 해석해야 결정내릴 수 있는 까다로운 문제들만 관리소장인 나에게 토스했다.
오후 4~5시쯤이나 퇴근 전 시간에 지루하다 싶을 때는 서로 감동적인 영화나 휴먼 드라마 얘기를 실감나게 주고받았다.
나는 집에서 아내와 많은 얘기를 하는 편이지만 사무실에서도 그 경리직원과도 감동적인 얘기를 많이 주고받았다. 또 얘기가 한참 연결되다 보니 얘기 범위도 점점 넓혀져 갔다.
지역 경리직원 모임을 하고난 후에는 그 지역에 문제 있는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를 드라마틱하게 얘기해줘서 주변 아파트단지 안의 실제적인 현장 분위기를 많이 파악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정말 정이 가는 경리직원이었다.
송별식이 끝난 다음에 조용하게 하는 말.
“신랑보다 소장님이랑 더 많은 얘기를 한 거 같아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나를 오피스 허스밴드(Office Husband) 쯤으로 생각하고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를 한 모양이다.
지난 번 같은 지역 아파트단지에서 경리를 뽑는다는 얘기를 듣고 일부러 관리사무실 분위기를 볼겸 직접 가서 그곳에 근무하는 관리소장과 점심을 같이 했다. 근무하기에 좋은 조건이라고 판단하고 그 경리직원에게 “근무할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고맙지만 아직 애들 교육문제가 있어서 좀 더 집안에 있어야겠어요.”
뭔가 글의 내용이 개인적인 핑크빛으로 번져가는 느낌이 드는 것 같은데, 전혀 그런 것은 아니니, 그 경리직원에 대한 얘기는 이 정도로 줄이고,
그럼, 결론적으로 관리소장과 경리 사이는 어떤 사이여야 좋을까?
‘친한 사이’여야 한다. 아껴주고, 실수한 것을 서로 챙겨주는 사이가 돼야 한다. 서로 보충적인 관계가 돼야 한다.
관리소장이 어떤 일을 기획하든지 그 내용에 대한 것을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경리와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1차적인 필터링을 거쳐야 대표회의를 할 때 다듬어진 언어와 말을 구사할 수 있고 매끈하고 부드럽게 진행할 수 있다. 그리고 부녀회원 등 여자 민원인을 상대할 때도 껄끄럽지 않은 답변을 할 수 있다.
아파트 관리업무는 여성적인 감정과 언어를 사용해서 접근해야 하는 감각이 많이 필요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간단하게 풀 릴 매듭 같은데 풀다보면 더 꼬이는 황당한 것들이 있다. 그리고 관리소장이 보기에는 한참을 풀어야 될 매듭 같은데 여자 경리직원이 나서면 신기하게도 쉽게 풀린다. 경리직원을 수직적인 조직관계에서가 아니라 러닝파트너로 인정하고 호흡을 같이 해야 원활하게 업무를 볼 수 있고, 상당히 많은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다.
서두에서도 얘기했지만 관리업무에서는 경리는 오피스 와이프여야 한다. 집안에서는 아내와 집안 친척문제와 아이 교육 등의 문제를 대화를 통해 정답을 찾아가듯이 관리사무실에서는 경리와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소장과 경리 사이는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사이가 돼야 하고, 서로 아껴주는 친한 사이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자애로운 웃음이 가득 퍼질 것이다.
그 웃음은 그냥 잠시 피었다가 꼭지가 떨어지는 그런 웃음이 아니다.
온몸에 배어 시간이 흘러도 사그라지지 않는 생명이 긴 그런 웃음이다.
‘친한 사이’라는 말에는 피가 잘 통해서 대화가 막히는 법이 없고
오해도 미움도 없어서 건강하고 그 표정이 밝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친한 사이’라는 소개를 들으면
그 말에는 적어도 내게 대한 믿음이 섞여 있는 말이다.
믿음이 없이는 ‘친한 사이’는 있을 수 없으나
그렇다고 그 믿음은 무작정 어떤 말이든 신뢰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다.
그릇된 점이 보일 때 가차(假借)없이 지적해 줄 수 있는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친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친구의 우정을 귀하게 받아들인다.
적당하게 칭찬만 해주는 친구는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우정은 사랑이 있는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친구일 때 가능하다.
‘친한 사이’는 적어도 자주 만나야 된다.
어떤 시인이 ‘사랑할 때 가장 필요한 선물은 시간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랑할 때 시간은 주지 않고 멀리서 좋은 선물만 준다고 할 때
그것처럼 안타까운 것은 없으리라.
결국 그 사랑은 허기져 죽게 될 것이 뻔하다.
사랑은 한마디로 그리움, 같이 있고 싶음 그것이다.
친한 사이는 바로 같이 있고 싶고, 그 시간을 최대한 누리는 사이일 것이다.
그러나 너무 서둘지 말라. 조금 멀리 있어도 자주 만나지 않아도
누구보다 친한 사이 일 수 있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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