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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학일반

백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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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읍 원정리 802번지 전자고택은 1920년경 박유붕의 증손인 박영재가 건립했다.

 

최초의 백운학 그는 누구인가?


최근까지 최고의 관상쟁이는 백운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한때 삼성그룹 창시자 이병철 회장이 신입사원을 뽑을 때 그 옆에 이름 모를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 분이 고개를 끄덕이면 합격이고 그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면 불합격이라는 말이 주간지에 심심찮게 나곤 했었다. 그러나 최초의 백운학이라는 관상쟁이가 청도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말의 마지막 황제인 고종이 등극하는데 에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중에 7살 된 명복이를 보고 전하옥체를 잘 보존 하시옵소서하면서 아이에게 절을 한 사람이 있었다. 이를 본 어린 명복이는 어른이 하는 행실이 하도 이상해서 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가 아버지 어떤 어른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고는 말을 그대로 전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명복이의 아버지인 흥선군 이하응은 곧 바로 그 말을 한 사람을 찾아나서 아직 멀리 가지 않은 박유붕(이하 존칭생략)을 만났다. 당신이 이 아이에게 왕이 될 상이라고 말한 사람인가? 라는 물음에 그대로 땅에 엎드려서 그렇습니다. 관상을 보니 왕이 될 기상이 서려있는 분이기에 제가 그렇게 말씀을 올렸습니다. 흥선군은 절대로 다른데 가서는 그런 말을 하지 말게 하고 당부를 하였다.

 

이 시대에는 안동김씨가 왕권을 장악하여 세를 누리고 있었던 터라 함부로 왕기가 서렸다고 말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이때부터 흥선군은 파락호로 전락하여 전혀 왕가와는 별개라는 듯이 살아왔다. 안동김씨의 사타구니를 드나들 정도로 절치부심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박유붕이 관상의 대가가 된 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박유붕의 처가가 두씨(杜氏) 집안이다. 두씨는 중국에서 온 성씨인데 임진왜란 때 이여송을 따라 왔던 두사충의 후예이다. 두사충은 이여송을 따라온 무관이긴 하지만 풍수와 관상에 능했다고 한다.

 

그런 그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던 관상과 풍수에 관한 비전(祕傳) 책이 있는 것을 알고는 어디에 간수(看守)하는가 보니 안사랑 다락에 두고 있는 지라 하루는 본채에다 불을 질러버리고, 모두 정신없이 불을 끄고 있는 사이에 다락에 둔 책을 품속에 넣고는 집으로 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열심히 관상과 풍수 책을 일고 연마하여 당시 조선제일의 관상의 대가가 되었다고 하며 당시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둘째 아들이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흥선대원군의 책사가 되어 인물을 고르거나 정책을 내세울 때 항상 곁에서 조언을 했다고 전한다.

 

박유붕은 헌종 때 증광 무과에 급제하여 언양 현감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 뒤에 전라도 우군수군절도사를 지내고 장단부사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흥선대원군에게 아들의 관상을 봐 주고 하사 받은 땅이 수선교에서 부터 돈암동에 이르는 지역이었다고 하며 19711225일 일어난 우리나라 호텔화재로 전무후무한 대연각 호텔이 바로 이 집의 호텔이었다. 이 건물의 주인이 청도의 박영재 씨의 소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박영재 씨는 청도에서는 박규묵으로 알려져 있는 분으로 박유붕의 증손자이다. 박유붕, 세칭 백운학 당신은 관상을 잘 보았지만 정작 당신은 그 재주로 인해 명을 재촉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당시 고종이 왕위에 올라 중전을 맞이하려 할 때, 안동 김씨들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100여년의 세월을 외척의 세력에 눌려 살아온 흥선대원군은 외척이 없는 민치록의 외동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려고 했을 때 민비의 관상을 보고 흥선대원군에게 절대 왕비로 맞아 들여서는 안된다는 조언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묻는 흥선대원군에 결국 좋지 않은 말을 했을 때 흥선대원군이 하는 말이 이 사람아 내 며느리를 보는 것이지 자네 며느리를 보는 것이 아니잖아하면서 결국은 민씨를 중전으로 맞이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흥선대원군과 박유붕의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한다.

 

이때 민비가 득세를 할 때 박유붕에게 전갈하기를 그렇게 관상에 대해서 용하다면 나에게 와서 나의 상을 한번 봐 달라고 했다. 그때 흥선대원군과 민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여서 가도 죽()을 판이고 가지 않아도 죽을 판이라 자기가 인두로 자기의 눈을 찔러서 애꾸가 되었다. 눈을 다쳐서 관상을 볼 수가 없어서 갈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 뒤로 얼마 있지 않아서 별세를 하였는데 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매천야록을 쓴 황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라도 구례사람 유재관이라는 인물이 무과에 급제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박유붕과 친교를 가지고 가끔 만났다, 그날도 유재관이 박유붕을 찾아 집으로 갔는데 박유붕이 사랑에서 방의 네 모퉁이를 뒹굴면서 몸의 아홉 구멍으로는 피를 흘리면서 눈을 부릅뜨고 팔을 뻗어 무슨 말을 할 것 할 것 같으면서도 말을 하지 못하고 죽어갔다고 하며 몸은 퉁퉁 붓고 얼굴색이 푸르 둥둥하더란 말을 전하였다. 아마도 독살을 당한 것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고 운현궁에서 박유붕과 함께 기거하던 그때 사람들은 그의 별명을 백운학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 후로 이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심심찮게 백운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작명이나 운명학을 논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지만 최초의 백운학은 청도가 고향인 박유붕 그 어른이었다고 하니 아는 사람은 겨우 몇몇 사람만 알고 그 외는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으니. 등하불명이란 말이 실감이 난다. 그의 증손인 박영재. 즉 박규묵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또한 그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부지기수 이다. 오늘은 구한말 관상의 대가인 백운학이 청도의 박유붕이라는 분임을 전하고 싶다. (2017.11.10. 청도신문/ 박윤제·청도문화원장)

 

청도신문 http://www.ch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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