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에서의 사주 수용.
조선 정사正史에서 사주를 맨 처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조선왕조실록 태종太宗편》이다.
태종공정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의 휘(諱)는 이방원(李芳遠)이요, (…) 태조(太祖)의 다섯째 아들이요, (…)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韓氏)이다. (…) 고려 공민왕 16년(서기 1367년) 정미 5월 16일 신묘에 함흥부 귀주(歸州)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한씨가 점치는 사람[卜者] 문성윤(文成允)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이 사주(四柱)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장이[卜人]에게 경솔히 물어보지 마소서’ 하였다.
당시 이방원의 아버지 이성계가 비록 고려의 무장이긴 하였지만 그 당시 고려 핵심 실세가 아니었다는 점과 개경이 아닌 변방 함흥에서 살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사주이론이 이미 수도뿐만 아니라 지방 도시의 유력자들에게까지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조 잡과 시험에 사주명리학 서적들이 정식 고시과목으로 채택되는데, 조선 성종 16년(서기 1485년)에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음양과(음양과)에 소속된 명과학命課學 고시과목은 다음과 같다.
경국대전(1485년)
初試: 袁天綱(背講), 徐子平, 應天歌, 範圍數, 剋擇通書, 經國大典(臨文)
取才: 袁天綱(背講), 三辰通載, 大定數, 範圍數, 六壬, 五行精記, 剋擇通書, 紫微數, 應天歌, 徐子平, 玄輿子平, 蘭臺妙選, 星命總話(臨文)
그로부터 약 300년 후인 영조 46년(서기 1770년)에 반포된 《속대전》에는 다음과 같은 과목들이 명과학의 고시과목으로 지정된다.
속대전(1770년)
初試: 袁天綱(背誦), 徐子平, 應天歌, 範圍數, 經國大典(臨文); 天文曆法(臨文)
覆試: 初試와 같음
위 가운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열람 가능한 책들은 《원천강袁天綱》, 《서자평徐子平》, 《응천가應天歌》, 《육임六壬》이며, 중국의 《古今圖書集成》에 수록되어 있어 역시 그 내용이 파악 가능한 것은 《삼진통재三辰通載》, 《오행정기五行精記》, 《난대묘선蘭臺妙選》 등이다.
이들 명과학命課學 고시과목들 가운데 사주명리학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응천가》, 《서자평》, 《원천강》이며 그 밖의 것들은 육임점, 별점, 자미두수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응천가》, 《서자평》, 《원천강》 등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응천가》는 곽정郭程이 지은 것으로 알져져 있으며, 현대 시중에서 유통되는 사주명리학에서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 ‘육십갑자납음오행六十甲子納音五行’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 밖의 내용들은 ‘포태법’, 신살神煞, ‘오행의 상생상극’을 기본 토대로 하는 것이어서 현대 시중의 사주명리학의 내용과 동일하다.
《서자평》은 사주 서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히는데, 송대 사주이론의 완성자인 서자평의 이름을 그대로 책명으로 한 것이다.
이 책의 편찬자 서대승이 서문을 쓴 날짜를 “寶祐10월 望日”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출간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는데, 보우寶祐는 중국의 남송南宋 1253∼1258년의 짧은 기간에 사용된 연호로서 고려 고종 임금 재위기간에 해당된다. 따라서 고려 고종, 즉 13세기 중엽까지는 이 책이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현재 시중에서 역술인들 대부분이 수용하고 있는 사주명리학의 핵심적 내용들이 모두 수록되었는데, 그 핵심적인 것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당나라의 사주학이 태어난 년을 중심(年柱爲主)으로 하였음에 반해 이 책은 태어난 날을 중심(日柱爲主)로 하고 있다.
― 根苗花實論(태어난 해를 조상과 뿌리, 달은 부모와 싹, 날은 자신과 꽃, 시는 자식과 열매로 보는 논리)을 소개하고 있다.
― 육십갑자납음오행론六十甲子納音五行論을 비판하고 있다.
― 18가지의 격국格局과 더불어 당대의 유명 인사들의 사주 사례 소개하고 있다.
《서자평》의 내용은 현재 시중에 수용되고 있는 사주명리학의 내용도 더 이상 넘어설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즉 조선왕조 초기부터 중국 송대에 유행했던 사주명리학의 핵심 내용이 그대로 수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원천강》은 현재에도 통용되는 신살神煞로 보는 사주 내용을 망라하고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고려왕실에서 “사주”가 전혀 언급되지 않다가 왕조가 바뀌면서 갑자기 조선 왕조의 명과학命課學 고시과목으로 “사주명리학”이 채택될 수 있는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사주이론이 송나라 말엽인 13세기 후반에 완성된 체계를 갖추어 비록 고려 말엽에 고려에 유입되었을지라도 복업卜業의 새로운 고시과목으로 채택하기에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고려왕조로서는 너무 무력하였다.
둘째, 고려 왕조를 멸망시킨 조선 왕조의 새로운 ‘이념정책’이다.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들어섰음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제도와 이념에서 새로운 것들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교國敎를 불교에서 유교로 바꾼 것도 바로 그 하나의 예이다. 국교뿐만 아니라, 풍수학(지리학)의 고시과목도 고려왕조에서 채택한 것들은 모두 폐기 처분하고 새로운 과목으로 대체한 사실을 《고려사》와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을 비교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명과학 역시 그러하였다.그렇다면 조선왕조에서 사주의 수용은 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 초기부터 사주명리학은 당시에는 한문과 음양오행설에 정통해야 했던 만큼 관상감 산하 명과학 소속의 전문기술인들 뿐만 아니라 당시 학식이 높았던 대신들이 수용했다. 조선 세종 임금 당시(서기 1425년) 변계랑卞季良이 사주를 볼 줄 알았다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나타난다.
임금이 대제학 변계량을 불러서 명하기를, ‘유순도(庾順道)와 더불어 세자의 배필을 점쳐서 알려라.’ 하였다. 계량이 약간 사주의 운명을 볼 줄 알았고, 순도는 비록 유학에 종사하는 자이나 순전히 음양 술수와 의술로 진출한 자였다.
세종 임금이 세자의 배필을 정하는데 사주를 활용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다른 예가 정조 임금의 경우이다. 정조 임금은 세자빈을 정하는 데 사주를 결정 근거로 삼는다. 당시 정조 임금은 국복國卜 김해담金海淡에게 세자빈 후보들의 사주가 어떠한가를 묻는 대목이 나온다.
“오늘 간택한 처자들의 사주에 대해 묻는 것이니 그대들은 상세하게 아뢰어라. 기유년 5월 15일 유시(酉時)면 그 사주가 어떤가?”
이에 김해담이 답변하기를 “그 사주는 기유·경오·신미·정유이온데 바로 대길 대귀의 격입니다. 이 사주를 가지고 이러한 지위에 있게 되면 수와 귀를 겸하고 복록도 끝이 없으며 백자천손을 둘 사주여서 다시 더 평할 것이 없습니다.”
이 사주의 주인공은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로서 훗날 순조비가 된다. 사주는 단순히 한 개인의 운명이나 배필을 구하는 데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권력장악의 도구로서 활용된다.
조선 13대 임금인 명종 임금은 아들이 하나뿐이었다. 당시 조정은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좌지우지하던 참이라 명종은 평생 눈물로 보낸 왕이다. 이때 문정왕후의 친정 동생 윤원형은 언젠가 자기 누나인 문정왕후가 죽게 되면 자신의 권력도 끝이 날 것을 두려워하여 일을 꾸민다.
명과학 소속 국복國卜 김영창金永昌과 모의하여, 황대임黃大任이란 사람의 딸의 생년월일을 좋은 사주로 고쳐서 세자빈으로 문정 왕후에게 적극 추천한다. 이때 왕과 왕비는 황대임의 딸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문정왕후의 분부에 눌려 할 수 없이 그대로 하였다(그러나 황대임의 딸이 너무 병약함이 드러나 훗날 세자빈이 교체된다).
조선 왕조에서는 이 밖에도 사주가 역모사건에 자주 언급되는데, 실제로 역모나 반정을 도모할 때 내세우게 될 주동인물의 사주가 중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서 고려왕조에서는 인간의 운명을 예측하는 것으로 주로 별점(星命)이 활용되었다면, 조선조에서는 사주명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왕실과 사대부에 국한되었지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보급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렇다고 하여 일반 백성들이 자신과 집안의 운명이 어찌 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빈천하게 살기에 더욱더 요행을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나온 것이 ‘당사주唐四柱’와 토정 이지함의 이름에 가탁한 ‘토정비결’류이다.
중국의 당나라때 유행하였다하여 ‘당사주唐四柱’로 붙여진 것으로 그 보는 법이 간단하여 지금까지도 민간에 널리 유포된 사주학의 아류이나, 중국의 정사正史나 《고금도서집성》, 그리고 고려와 조선의 정사나 문헌에 전혀 언급이 없다. ‘토정비결’과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에 민간에 유포된 것으로 본다. 사주명리학이 음양, 오행, 십간, 십이지라는 네 개의 범주를 고루 사용함에 반해 ‘당사주’는 십이지만 활용하여 인간운명을 추리하는 방법이다. 사주전문가들은 거의 무시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심심풀이로 자주 애용되는 방법이다. ‘토정비결’과 ‘당사주’에 대해서는 또 다른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2.3 해방이후의 사주명리학: 官學에서 ‘邪術’로.
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공식적인 관학官學으로서 사주명리학은 사라졌다. 명과학 소속의 교수들로부터 강의를 받고, 초시와 복시를 거쳐서 선발되어 국가와 왕실의 주요 사건들에 점을 쳐야했던 만큼 교육 내용도 고도로 정밀했던 것이 조선조 사주명리학이었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과 해방이후 서구 합리주의 유입으로 사주명리학은 뒷골목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비록 잡과이긴 하지만 조선조처럼 관리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닌 풍수학이나 사주학과 같은 ‘케케묵은 미신’에 해방이후 젊은이들이 매달릴 까닭이 없었다. 능력만 있으면 다양하게 더 좋은 직업의 선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1980년 이전까지 사주학이나 풍수학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사회 적응에 실패한 ‘좌절된 인생’들의 호구지책으로 활용되면서 사술邪術로 타락하게 된다. 학습능력을 갖추었으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또는 어떤 사유로 좌절된 인생들의 성격은 대개 ‘성격파탄’, ‘다중多重인격’적일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경우 더러 신기神氣를 띠면서 사주이론을 빌어 말하다보면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기도 한다. 그들에 의해 말해지는 사주학이나 풍수학은 그야말로 사술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이 사주명리학을 조선조 명과학 관리들처럼 체계적으로 교육기관을 통해 습득한 것도 아니었기에 사주명리학의 수준 역시 지극히 조잡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흔히 이들은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한학을 배웠다”느니, “큰 뜻을 품고 입산수도 하여 크게 도를 깨쳤다”느니, “이인異人을 만나 사주의 비결을 전수 받았다”느니 하면서 자신들의 책이나 광고에서 자신들을 소개하나 해방이후 우리 나라 사회여건상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자신들은 《자평진전子平眞詮》, 《적천수滴天隨》, 《명리정종命理正宗》, 《궁통보감窮通寶鑑》 등 현재 많이 읽히는 사주의 고전들을 해방 전부터 혹은 어려서부터 읽고 공부를 했다고 하나 이와 같은 책들은 1960년 전후까지 우리 나라에 들어오지 않은 책들이었다.
최근에 대학 사회교육원과 각종 문화센터에서 인기 있는 강좌 가운데 하나가 ‘사주학’이다. 갑자기 쏟아져 나온 많은 강사들의 자질 또한 사주학의 올바른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 특별한 공인된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도권 교육기관이 사주학 강사들을 배출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자질을 검증할 수 없다. 대학 사회교육원 강사들이 버젓하게 “대학교수”라는 명함으로 광고성 책들을 출간하거나 자신들을 소개함도 현재 일반인들의 사주에 대한 객관적 수용을 흐리게 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 사주명리학을 업으로 하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역술인협회’에는 10만 여 명이 등록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등록되지 않고 활동하는 사람, 아마추어 등을 합하면 20만 명 이상이 사주명리학을 ‘전공’으로 하는 셈이다. 이 가운데 제대로 실력을 갖춘 ‘사주 전문가’는 극소수이다. 어쨌든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 가운데 하나가 사주서적이란 점과, 심지어 사주관련 월간지까지 발행되고 있음에서 사주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사이비 술사들과 사술화의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 박재완朴在玩(작고), 김재현金載炫(작고), 이석영李錫映(작고) 등 극소수가 나름대로 해방이후 사주학의 명맥을 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80년 이후에는 이미 해방이후 합리주의 교육을 받은 이들에 의해 사주가 다시 쓰여지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법조인 출신으로 알려진 백영관白靈觀이 지은 《사주정설四柱精說》(1983)이다. 이후 《연해자평》, 《적천수》, 《명리정종》, 《궁통보감》 등 중국서적들이 번역되고, 이를 바탕으로 한글세대가 ‘전통사상’으로 사주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사주명리학은 또 다른 전개과정을 겪고 있다.
인터넷 시대와 더불어 사주업계도 역시 ‘온라인 사주’와 ‘오프라인 사주’로 나뉘어지면서 전자가 점차 그 수를 더해가고 있는 추세이다. 현재 인터넷에서 사주 관련 사이트는 100여 개, 취미수준의 사주 홈페이지까지 포함하면 1천 여 개가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익명성과 신속성이 있는 ‘온라인 사주’의 수요가 늘기는 하나, 개인이나 한 집단의 중대한 결정을 하려는 이들(정치인/ 기업인들)은 은밀하게 실력 있는 사주 전문가를 직접 찾아가 일대일 상담을 하기 때문에, 현재 ‘한국 사주 시장’의 큰돈은 ‘오프라인 사주 전문가’들에게 흘러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사주명리학에 대한 올바른 자리 매김과 학술적 평가, 혹은 이에 대한 비판적 수용 등은 제도권 학계에서 진지한 관심을 보여야 가능하다고 본다. 민속학이나 문화인류학, 혹은 동양철학 등의 학제간의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조선조 초기, 세종부터 성종 년간에 활동했던 서거정(徐居正)의 저서인 "필원잡기(筆苑雜記)"는 성현의 `용재총화`와 더불어 조선조의 쌍벽을 이루는 문집(文集)이다.
서거정(徐居正)은 자는 강중이고, 호는 사가정(이를 딴 사가정길이 서울에 있다), 시호는 문충. 권근(양촌 선생)의 외손이고, 6임금을 섬기며 육조의 판서(장관)를 모두 지냈고, 대사헌 (검찰총장격)을 2번 역임. 조정에 근무한 것이 45년. 과거시험관을 23번 지냈고, 6살에 글을 읽고 시를 지어 신동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저술.편찬에도 참여했고 창경궁의 전액을 짓고 쓰고 한 것도 그였다.
서거정은 한마디로... 천재요 유능한 정치가요 탁월한 행정능력을 갖춘 테크노트라트이자 매우 활달하고 재치와 유머에 능한 인물이다. 그에 관한 기록들이 여기저기 나오고,특히 `해동잡록`이나 `추강냉화`등등 여러곳에 나오는데 모두 해박하고 유쾌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 유명한 "필원잡기"를 보면..
세조(수양대군)는 음양 지리의 글에도 능히 통하여, 그 옳고 그름을 밝게 보고 판단하였다. 일찌기 거정(居正....자신을 낮추어 지칭)에게 말하기를
---( 세조의 말씀을 잘 보자)---
"녹명서(祿命書)는 유학자가 窮理(공부하고 익히는 것)하는 하나의 일인데 너도 아느냐?"
"네... 일찌기 대강 보았습니다."(겸양의 의미가 들어있다. 이런 투의 말은 공부해서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네가 가령서(假令書: 사주풀이 책)을 한편 지어보라!"
*** 녹명서(祿命書)라는 말은 예전에 사주명리를 일컫는 말로 널리 쓰였다.
재미있는 것은... 불경(佛經)에도 이 녹명서란 말이 나온다. 불자들이 애독하는 "천지팔양경"(天地八陽經:이름 부터가 냄새가 팍 나지 않는가^^)을 보면 그 내용중에 "사람의 길흉을 알고자 하면, 녹명서(祿命書)를 보면되고.....운운"
시중에 나와있는 `천지팔양경`을 한번 보라.
`내가 물러 나와서 여러책을 모아 그 대요(大要)를 뽑아서 분류해 모으되 범례(凡例)를 먼저하고, 길흉신살(吉凶神殺)을 다음으로 하고, 길흉론단(吉凶論斷)을 끝으로 하여 지어 바쳤다.`
세조가 말 하기를
"이 책을 지어서 궁중 사람으로 하여금 가르쳐주는 수고가 없이 스스로 밝히 알도록 함이다."
그런데 서거정의 천재성은 여기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즉, 이어지는 세조의 질문에... 지금의 수학적 계산으로도 만만치 않은 .. 사주의 가지수를 정확하게 오차없이 518,400가지 임을 계산근거와 함께 보고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기록은 .. 그의 대답 중에 거명되는 이름인데 이순풍(누구?). 이허중, 소요부(邵堯夫: 누군가... 소강절?) .서자평이 등장한다.
물론 서거정 본인은 이 대목의 맺는 말 부분에서는.... 사주에 대하여 부정적 입장을 표명한다. 분위기 탓도 작용했다고 본다. (유학자요 관리로서 조선조의 학풍과 시대정신 등등)
그러나 한참 뒤의 내용을 보면 다르다. 즉, 이런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내용중에......
`문성공 정인지의 본명사주가 병자년. 신축월, 무술일, 을묘시인데.... 소동파의 사주와 동일한바... 두 사람의 삶의 내용이 대략 같고, 문장력과 명망도 비슷하다... 운운`
매우 더 중요한 것은 서거정이.. 정인지(鄭麟趾)의 신도비(神道碑: 어떤 비석을 의미하는지?)를 지었는데, 그 비문에도 "사주와 행운이 소내한(蘇內翰; 소동파의 별칭)과 같다."고 썻고 또한 이익재(李益齋) 선생이 문정공 권국재(權菊齋)의 비문을 지었는데 .. 그 내용중에 `戊子, 己未에 헛되게 壬, 己의 祿이 끼어 서로 상충하여 발한다.`라는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여러가지를 알 수 있다.
최고의 엘리트 관료들은 물론이고, 궁궐내에서... 그리고 임금까지도 사주학에 대하여 일반화된 광범위한 사용권내에 있었다는 것과, 더욱 중요한 것은 최고의 관료집단과 유학자들은 소위 당사주가 아닌, 제대로의 모습을 갖춘 명리학을 사용했다는 점이다.[주자의 성리학의 세상 속에서도 면면히 내려오는 우리 동양학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계가가 이 작은 지식을 통해서 깨어 나시길...]
사주의 가지수에 대한 내용(129,600 의 숫자는 소강절 선생님의 우주 1년 도수에 해당 합니다.)과 ... 그들이 거명하는 인물들이 모두 그것을 반증해 주고 있다.
그리고 명리학을...유학자들의 궁리(공부및 연구)의 대상으로 .. 임금이 지목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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